09: 이에디

13월의 문: 7th
2024.01.23

***

 

  “이디, 이건 어때요?” 단짝 친구의 발랄한 목소리에 돌아본 이디 그리즐의 턱이 툭 떨어졌다. ‘충격적으로 새빨간’ 벨 라인 스팽글 미니 드레스가 에드나 엘레이의 손에서 살랑거렸다. “올해 보바통 여학생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라인이라는데., 여기 왼쪽 어깨에 드레이프 보여요? 마담 드 메르의 시그니처 디자인이래요.” 반댓손에 든 카탈로그의 설명을 연극조로 읊는 친구의 눈가는 언제나처럼 색안경으로 가려져 있었으나, 이디는 어쩐지 그 눈이 장난기로 잔뜩 휘어진 모양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짧은 검은 드레스, 긴 검은 드레스, 우아한 검은 드레스, 아무튼 검은 드레스들 사이에서 고민하던 사람 앞에 던져진 빨간 옷감이란…. 

 

  “에디, 이건 빨간색이잖아!” 하지만 제 옷 고르는 일도 제쳐두고 총총 옆으로 다가온 에드나는, 이디의 항변에 의외로 제법 진지한 투의 반박을 한다. “프롬이잖아요! 모름지기 이런 날에는 평소에 안 입던 스타일로 변신하는 게 미덕이라고요. 고전 소설에서부터 유구하게 이어져 온 드레스-업 클리셰는….” 이하, 에디 엘레이 특유의 장황한 논설. 프롬 안내문이 게시판에 붙은 날부터 온갖 야회복 카탈로그를 뒤지던 사람다운 내용이다. 그러나 이디 비어든 그리즐의 고집 역시 나름 굳건하여,

 

  “하지만 내가 그런 걸 입으면 시공간이 분리되지 않을까? 아무튼 내가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을 입을 수는 없는 노릇이야. 시공간이 분리된다구.”

  “완전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거 알죠, 이디?”

 

  …따위의 농담(어쩌면 진담)으로 이루어진 설득과 타협의 시간이 꽤 오래 이루어진다. 그러나 친구에게 화려한 채도의 옷을 입혀 보겠다는 에드나 엘레이의 원대한 포부는 결국 좌절된다. 양장점의 문을 밀어 열고 나란히 돌아가는 두 여자애는 희비가 다소 엇갈리는 대화를 주고받는다.

 

  “내 까만 리본을 보라니까. 얘는 나랑 같이 태어났다고.”

  “그럼 이제 슬슬 걔만의 삶을 살게 보내주라고요. 그거 분리불안입니다. …뭐, 디자인은 맘에 들지만….”

 

***

 

  일곱 해는 쏜살같이 지나간다. 책 한 권으로 다섯 시간을 떠들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단짝이 된  꼬마들은, 다소 변함없이 자라 여전히 한 편의 이야기로 밤을 꼬박 지새며 토론할 수 있는 청소년이 되었다. 이디의 키는 적당한 수준에서 멈췄고 에드나는 그보다 조금 길죽한 꺽다리로 자랐다. 눈높이가 비스듬한 두 소녀는 자타가 공인하는 래번클로의 괴짜들이었다. 같은 방을 쓰는 그 여자애들은 수업이 없는 빈 시간 자주 사라졌는데, 어느 누구도- 즉 동급생들도, 선후배들도, 교수님들도 걔들이 당최 어디에 숨었는질 몰랐다… …자그마치 칠 년 내내. 이디 그리즐과 에디 엘레이는 종종 아무도 모를 어딘가에 콕 박혔다가, 부드럽게 녹은 귓가에 두툼한 목도리를 둘둘 감고 나타나곤 했다. 가끔 그 애들한테서는 무언가 생경한 향이 났다. 풀 냄새, 흙 내음… …이제는 쉽게 맡기 어려운, 온실의 가장 깊은 곳에서나 맡을 수 있는 자연의 것들. 

 

  전 세계를 휩쓸기 시작한 겨울의 영향에 호그와트 부지 역시 속절없이 휘말렸다. 바깥 정원은 일 년의 절반 이상 크리스마스나 다름없는 모양을 띠었고, 그건 야외 활동을 하기엔 영 좋지 않다는 뜻이었다. 퀴디치 경기는 느닷없는 눈보라에 종종 취소되기 일쑤였으며 꽃이나 과일은 3번 온실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도 약초학에 큰 흥미 없는 학생들이 초록을 연상시킨다는 건 참 특이한 일이었다….

 

  …물론 이디 그리즐과 에드나 엘레이만이 정확한 이유를 알았다. 그건 꼬박 일곱 해를 이어 온 둘만의 비밀이었다. 옷장 속 코트와 목도리를 헤치고, 손을 꼭 마주잡은 채 맨발로 안에 들어가 문을 닫으면-

 

  -바야흐로 초여름이다. 혹은 늦봄. 어쨌거나 마지막 학기에 어울리는 그런 계절. 

 

  “졸업 전에 이디, 당신한테 초록 치마를 입혀보겠다는 큰 꿈이 있었는데 말이죠….”

  “네가 나한테 대 본 드레스는 새빨간 색이었어, 에디!”

  “아아, 그건 일종의 회유책을 시도한 거였습니다. 가장 충격적인 선택지를 보여주고 좀 더 온건한 쪽을 제시해서 이 정도면 괜찮겠지, 생각하도록 만들려는….”

 

  완전 실패했지만요. 에드나 엘레이가 과장스레 한숨을 쉬었다. “요령은.” 짐짓 눈을 흘기는 이디 그리즐은 결국 우아한 ‘검은색’ 드레스 차림이다. 부드러운 옷감은 팔의 곡선을 타고 흘러내리며, 평소와 달리 예스럽게 머리를 틀어올려 차림에 걸맞는 고전적인 분위기를 냈다. 색감은 좀 부족할지라도 나름 훌륭한 조화였다. 에드나는 이디의 허리를 장식하는 푸른 천과 손목의 새파란 장미 장식을 흘긋 보고, 그 정도에서 위안을 찾기로 한다. 어쨌거나 제 친구에게 검은색이 잘 어울린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기에. 

 

  그러는 에드나 엘레이의 정장 옷깃에도 같은 모양의 하늘색 장미 부토니에가 매달려 있다. 물론 에드나가 고른 야회복이란 좀 과할 정도로 힘을 준 비둘기색 스트라이프 슈트다. 하지만 옷 취향 정반대인 두 사람이 장식만큼은 모처럼 같은 모양을 택했다. 그야 소녀들이 졸업 파티가 한창인 연회장의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를 벗어나 가는 곳은, 오직 둘만이 아는 비밀 세계의 문 뒤이기 때문이다. 따지자면 일종의 파트너인 셈이기도 하고…. 평소보다 굽 높고 장식 많은 구두를 골라신었던 에드나는 래번클로 탑에 들어설 무렵부터 까치발 잔뜩 든 맨발이다. 이디의 무난한 메리 제인 슈즈는 조금 더 오래 발에 신겨져 있었으나, 결국 모양 다른 두 켤레 신발이 옷장 앞에 뒹굴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처음 옷장 뒤편, 둘만의 ‘나니아’ 를 발견한 뒤로 이디와 에드나는 여러 옷장을 통한 수많은 변수들을 실험해 왔다. 호그와트 바깥으로 나간 뒤에도 둘이 손 꼭 붙들고 맨발로 들어선 옷장에는 ‘13월’ 로 떠나는 문이 생겼다. 그러나 다른 문들이 일회성의 입구였던 반면(혼자 들어서면 문은커녕 옷장 뒤편에 머리를 박게 됐다), 호그와트에서 발견한 첫 번째 문만은 언제든, 어떤 방식으로든 닫히지 않고 두 소녀를 환영했다. 혼자 들어가든, 둘이 들어가든, 신발을 신든 벗든 양말 바람이든 맨발이든 손잡이만 돌리면 초록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으나 여자애들은 이제 습관적으로 맨발바닥을 흙 위에 디디곤 했다. 어쩌면 나름의 의식이나 다름없었다. 옷장 뒤편의 세상이 마법의 공간이라면, 그곳은 체통 없이 맨발로 뛰어노는 꼬마들을 위한 곳이기 때문에. 마법의 나라의 규칙은 단 하나였다. ‘어른’ 이 생각할 법한 바깥의 복잡한 이야기- 세상의 멸망이니 사이비 창궐이니 저편 어드메 이름 모를 누군가의 동사 소식이니 따위의- 접어 두고, 그저 아이가 그렇듯 천진한 대화나 주고받을 것. …현실로 돌아갔을 때 문득 스치는 괴리감에 등골이 오싹할지라도. 

 

  일종의 도피이나, 어느 정도 섬세한 성정을 지닌 둘에게 이 롤플레잉은 나름 위로가 된다. 열일곱 아가씨들은 이 때만큼은 동심으로 돌아가 걱정 없는 세상으로 뛰어든다. 때로 이 안온한 비밀 장소가 기꺼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가령 아무 생각 없이 즐기고 싶은 날… …졸업 파티 당일이라든지.

 

  이 밤에도 변함없이 13월의 공간은 선선한 여름 초저녁의 공기를 띤다. 따스하나 아직 습기 덜 머금은 바람이 기껏 잘 매만진 머리칼을 흐트러뜨린다. 시원하고 촉촉한 잔디를 나란히 밟는 걸음이 가볍고 코끝에는 익숙한 흙 냄새가 감돈다. 지난 주 구근을 심어 보겠다고 오솔길 어귀를 온통 파헤쳐 놓은 탓인지도 몰랐다. 사람의 흔적 없던 이곳은 일곱 해를 거쳐 오롯 두 사람의 자취를 품었다. 이제 옷장 근처의 빈 공터에는 작은 탁자와 빈백 소파, 누군가의 마법약 과제나 다 쓴 잉크병, 끝이 다듬어지다 만 깃펜 따위가 굴러다닌다. 탁자 앞에는 작은 양피지 한 장이 붙어 있는데, 오랜 시간을 거쳐 한 줄씩 추가한 양 문장을 이루는 글자체가 제각각이다. <잠깐! 넥타이는 챙겼나요? 잠깐! 내일 과제를 테이블에 올려두고 오진 않았나요? 야호, 이제 마법약 수업 안 들어도 된다!> …기타 등등.  

 

  “다음 주에는 오랜만에 피크닉을 할까? 크루아상이나 산딸기 주스 같은 걸 챙겨서 말야.” 

 

  주로 시간을 보내는 그 오붓한 공터를 가로지르며 이디가 문득 운을 뗀다. “천재예요. 이디? 난 애플 파이도 괜찮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에드나가 자연스레 받으며 키득거린다. 오늘은 조금 더 걸어볼 참이다. 근방에 작은 개울이 있고, 운이 좋으면 반딧불이나 여름 은하수도 볼 수 있다. 무도회를 즐기다 빠져나와 고즈넉한 산책을 즐기는 것도 나름 소설의 클리셰다. 그 정도의 가벼운 낭만으로도 만족할 만한 둘이었는데, 

  

  “이디?”

 

  에드나가 고개 갸웃하며 한 박자 늦게 멈춰 섰다. 이디는 이미 눈가를 가늘게 하고 조금 떨어진 건너편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 “에디, 내 기억이 틀린 게 아니라면 저쪽은 그냥 평범하게 목초지였는데?” 그제야 에드나 엘레이도 손차양을 하며 친구가 가리킨 방향을 건너다보았다. 말대로였다. 완만한 구릉과 갈대풀 따위가 이어지던 숲 건너편으로 비죽하게 튀어나온 것은… …건물이다. 이 목가적이다 못해 사람의 흔적 없는 반경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인류 문명의 흔적이다. 둘은 약속이나 한 듯 서로를 돌아보고 눈을 씀벅였다. 

 

  “뭐지? 외계 문명? 아니면 우리가 아직 만나지 못한 나니아 신인류?”

  “꼭 갑자기 땅에서 솟아난 것 같구나… …가 봐도 되는 걸까?”

  “들어가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거 아니에요?”

 

  몇 가지 가설이 오갔지만 어느 하나 확실한 것은 없었고, 결국 두 여자애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벽돌로 지은 건물 외벽만 뚫어지게 노려보는 짓을 반복했다. 그러나 하나 분명한 사실이 있다면, 이디 그리즐과 에드나 엘레이는 호기심과 탐구심이라는 주박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인간들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수많은 불길한 상상을 번갈아 주고받으면서도 기어이 고풍스러운 문고리에 손을 댄 이 애들은- 

 

***

 

  안은 밖에서 보는 것 이상으로 널찍했다. 마법사 나이로 이미 성년이 된 이디와 에드나는 그만 열한 살 꼬마로 돌아간 듯 맹한 얼굴로 입을 딱 벌렸다. 커다란 회랑, 중앙을 향하여 오르다 중반부에서 둘로 갈라지는 멋진 계단, 간명한 직선과 우아한 곡선으로 이루어진 벽과 기둥…. 그러나 두 소녀 중 누구도 ‘와, 박물관 같아’ 따위의 표현을 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맙소사, 살면서 본 책들 중 가장 많은데요….”

 

  이 너른 공간과 벽을 꽉 채우도록 서가가 들어차 있었고, 각양각색의 책들이 빈틈없이 자리를 메웠기 때문이었다. “도서관이야.” “도서관이군요.” 이디 그리즐과 에드나 엘레이의 중얼거림이 기묘한 화음이 되어 퍼졌다. 그리고 두 여자애는 약속이나 한 듯 꽤나 래번클로적인 행동을 시작했는데, 계단을 타고 올라가며 서가의 책들을 훑기 시작한 것이다. 일말의 의심이나 두려움은 이미 씻은 듯 사라졌다. 그도 그럴 듯이 이 애들은 책 앞에서 얌전할 수 없는 성정을 타고났다. 서가를 탐닉하던 행동은 곧 한층 대범해져 건물 전체로 걸음을 넓혔다. 책등만 손끝으로 두드리며 제목을 읽다가, 이내 마음에 드는 표제를 냉큼 골라내 후루룩 넘겨보기도 하고, 둘 외에 다른 사람 없다는 확신 들고 나서부터는 몇 권 골라내 두둑히 양 손에 들고 마저 탐사를 진행하기도 하고…. 

 

  “이디, 이리 와 봐요!” 

 

  복도 중간마다 문이 없는 작은 방처럼 생긴 공간이 군데군데 있었다. 꼭 열람실의 독서 공간 같은 아늑한 공간이었는데, 2층 계단 앞쪽의 공간 하나에 고개를 들이민 에드나 엘레이가 친구를 불렀다. 이디 그리즐이 목소리를 따라가보니 에드나가 웬 축음기를 앞에 두고 손잡이를 서툴게 매만지고 있었다. 이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축음기네? 틀 줄 알아?”

  “글쎄요. 우리 집에 있는 전축도 이렇게 옛날 모델은 아니어서… …그래도 기본은 비슷할 테니까.”

 

  에드나가 (다소) 불길한 소음을 내며 축음기를 작동시키려고 노력하는 동안, 이디는 아랫쪽 서랍에서 음반 한 묶음을 찾아냈다. 대부분 제목이 없거나 생소한 표제를 달았길래 새파란 종이로 겉면을 싼 앨범 하나를 쏙 골라냈다. 꽤 끈질긴 시행착오 끝에 음반 위에 바늘을 올려두자, 옛 기계 특유의 노이즈 사이로 은은한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왔다. 야호! 손바닥을 마주친 둘은 잠깐 휴식을 취하기로 합의를 봤다. 이디는 축음기 옆의 폭신한 공단 의자에 앉았고 에드나는 그 옆 바닥에 느긋하게 주저앉았다. 손에 든 책이나 팔랑팔랑 넘겨보던 에드나가 고개만 비스듬히 들어 이디를 올려다보았다. “칠 년이나 여길 오갔는데 이제야 도서관을 찾았다니 말도 안 되죠? 분명 뭔가 마법이라도 작동한 거야. 우리가 처음으로 옷장을 통해 들어왔을 때처럼요.” 

 

  “내 생각도 그래. 여긴 우릴 위한 선물인 걸까?” 책으로 가득한 건물이라니 꼭 책 좋아하는 애들을 위한 선물 세트 같다고, 이디 그리즐이 새삼스레 주변을 둘러보았다.  “졸업이 코 앞이니까, 졸업 선물이겠네.” 

 

  “가끔 생각합니다. 학교를 떠나면 이 세계도 사라질까? 나니아 연대기에서도, 다 큰 애들은 다시 나니아에 가질 못하잖아요.” 

 

  지금이야 어디서든 둘이 함께 옷장을 열면 사계절 있는 세상으로 갈 수 있지만, 완전한 성인이 되면 그 또한 끝일지도 모른다고…. 에드나 엘레이가 그런 사념을 슬쩍 내비쳤다. 졸업이 다가올수록 수 번이나 반복한 걱정인 듯 자연스레 흘러나온 물음이다. 이디 그리즐 역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한다. 둘만의 아지트. 모든 근심과 추위와는 아주 유리되어 있는 공간. 두 사람이 의도하여 바깥의 혼란과 분절시킨 장소. 이 여름과 흙내음을 잃는다먼 분명 슬플 것이다. 헛헛할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내년 이맘때쯤에도 두 사람이 함께 여름 시냇가로 소풍을 나설 수도 있는 일이니- 이디는 그저 눈 돌리는 대로 보이는 서가에 한 번씩 눈길을 주고 떠오르는 바람을 말로 옮긴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네. 졸업 전까지 여기 있는 책을 다 읽을 수는 없잖아. 다 둘러보지 못하면 너무 아쉬울 거야.” 

 

  맑은 클래식 선율이 잦아들자 에드나가 팔만 쭉 뻗어 음반을 뒤집어 올렸다. B면에 녹음된 곡명 역시 불명이나, 리듬만큼은 익숙하다. 느긋한 재즈. 누군지 모를 가수의 허밍과 두세 대의 악기로 이루어진 하모니는 슬쩍 가라앉았던 기분도 다시 유쾌하도록 만든다. 다리를 쭉 뻗고 귀를 기울이던 에드나가 느닷없이 책을 접어 치우곤 벌떡 일어난다. 역전된 눈높이에 이디가 눈으로 묻는다. ‘왜?’ 그러자 그 앤 꼭 빨간 드레스를 권할 때처럼 장난스레 씩 웃더니, 마치 왕족이라도 된 양 과장된 태도로 손을 내밀며 허리를 굽힌다. 

 

  “곡이 좋잖아요? 무도회 날 여름밤 데이트의 끝은 분위기 좋은 곳에서 댄스 한 번이라구요.” 

 

  여긴 애초에 우리가 춤 연습 같이 하던 옷장 속 세상이고, 마침 우린 새 연회복 차림이고, 파란 장미도 나누어 달았고…. “그러니까 얼른요, 레이디 그리즐. 내 춤 신청 받아주지 않을래요?” 예의 호칭으로 친구를 부르며 에디 엘레이가 내민 손을 잘게 흔든다. 능청스러운 얼굴에 ‘제발’ 이라고 써 있는 것 빤히 드러나 이디 그리즐이 키득이며 손을 맞잡았다. “어차피 맨발이니 발 밟아도 불만 없기야, 엘레이 경. 전에도 말했지만 난 춤을 정말 못 추니까.” 

 

***

 

  서가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어슴푸레한 조명에 그림자를 기울이며, 그다지 격식 없는 춤을 추는 두 소녀가 있다. 우아한 구둣발 소리 대신 잔웃음 소리, 아차 하고 숨 삼키는 소리, 가볍게 주고받는 별 거 아닌 농조가 두서없이 스친다. 옷장 너머 연회장에선 한껏 성장盛裝한 동기들이 한겨울의 파티를 즐기고 있겠으나, 초여름 도서관을 배경으로 한 맨발의 재즈 댄스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아니, 오히려 졸업을 앞둔 어떤 순간에는 이 편이 더 기꺼울 것이다… …13월의 선물, 옷장 속의 새로운 비밀을 나눠 가진 이디 그리즐과 에디 엘레이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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